그 말도 맞다.
돈이란걸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살다보니, 그 말도 맞다.
너무 가진게 많아도, 너무 가진게 없어도 좋다는 않다.
그저 남들 가진 만큼만, 없는 만큼만 가지고 안가지는게 가장 적당하다.
사람들과 같이 살아 갈려면 그 말도 맞다.
돈이란걸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살다보니, 그 말도 맞다.
너무 가진게 많아도, 너무 가진게 없어도 좋다는 않다.
그저 남들 가진 만큼만, 없는 만큼만 가지고 안가지는게 가장 적당하다.
사람들과 같이 살아 갈려면 그 말도 맞다.
꽤 오랫동안 나는 사진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카메라만 해도 13대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시절도 있었고, 여행도 많이 다녔었다.
인화,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다양한 사진장르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내가 좋아했던 카메라 브랜드는 늘 고정이었다.
일반 카메라 캐논, 올림푸스 클래식 카메라는 레이카, 롤라이, 이외 러시아와 독일 카메라 브랜드
클래식 카메라는 저렴한 것들은 아주 저렴했으나, 이름이 오랫동안 알려진 녀석들은
무지 비싸서, 만져보기만 했었지, 품어볼 순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도 레이카는 카메라의 로망이었다.
여기서 말하려는건 클래식이 아니라 내가 캐논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연애사진이란 꽤나 오래전에 나온 일본영화가 있다.
청춘 남여의 러브스토리인데 그 매게체가 사진이었다.
그 남자 주인공이 사용했던 기종이 캐논 old 수동의 최고 기종인 nF-1 이란 녀석이었다.
물론 렌즈들도 FD 렌즈 최고들이 등장했지만..
다른 주제들에 비해서 사진에 대한 영화들이 그리 많지 않은 가운데 봤었던 영화여서 그런지..
그 전에도 유독 캐논만 좋아했었는데, 그 영화 이후로 더 캐논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요즘 시대의 카메라 브랜드 중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캐논과 니콘.
이상하게 니콘은 항상 별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모든 카메라들이 카메라 마다 셔터음과 각각의 개성들이 다르다.
그런 가운데 니콘과 캐논 역시나 그 색감은 너무나도 다르다.
캐논은 정확하고, 컬러풀하고, 다소 직선적인 느낌인데,
니콘의 경우 약간은 구름 많은 햇살 가득한 오후의 느낌이라 해야하나..
니콘에 관심이 안생겼던게 어설프게 필름을 따라한다는 그런 느낌 때문일까..
하지만 캐논이나, 니콘이나 필름 카메라를 써봐도 동일한 필름을 사용했음에도 그 두 브랜드의 차이점은..
디지털 카메라에서 느껴지듯이 그대로 느껴진다.
어쨌든, 난 캐논 카메라를 좋아하는데, 왜 캐논 카메라의 history를 이제서야 관심있게 봤을까? 하는거다.

일본내 생산된 고급 35mm 카메라의 서막라이카와 콘택스 – 가장 앞선 35㎜ 포컬 플래인 셔터 카메라의
두 대표 상표 1932년에 “라이카 모델 II”가 소개되고, 1933년에 “콘탁스 모델”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세계 카메라 왕국 독일의 자존심인 이 두 상표는 전세계 카메라 팬들을 만족시켰으며 그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최상급 카메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일자리였던 은행에 취직한 일본 유명 대학 졸업생의 평균 초임이 약 월 70엔 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이카 카메라의 가격은 420엔이었습니다.
이러한 최고급 카메라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다까네 노하나(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라이카 모델 II” 카메라를 분해하여 그 내부 작동을 연구함으로써 최초의 일본내 포컬플래인
셔터 거리계 카메라(이하 35mm 거리계 카메라로 칭함)의 제작을 시도한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시다 고로(1900-1993) 씨였습니다.
요시다 씨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중학교 과정을 마치기 전에 도쿄로 와서
활동 사진 카메라와 영사기를 수리하고 개조하는 회사의 견습공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그의 나이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 그는 직무상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자주 여행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상하이에서 만난 한 미국 무역상 로이 E 딜레이 씨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후 고급 35mm 거리계 카메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왜 카메라 부품을 사러 여기까지 왔습니까? 당신 나라는 이미 훌륭한 군함과 비행기를 생산했습니다.
당신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군함을 생산할 수 있다면 고유의 카메라 부품을 못 만들 이유가 없지요.”-
천성적으로 요시다 씨는 기계와 기기들을 수리하는 일을 좋아했고,
이미 그는 활동 사진 카메라와 영사기를 수리하고 개조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시다 씨가 카메라 제조에 매력을 느꼈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제 고급 35mm 카메라를 만들기 위해 라이카를 분해했던 동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요시다씨는 후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는 특별한 계획 없이 단순히 부품을 보려고 그냥 그 카메라를 분해했습니다. 카메라 안에 다이아몬드와
같은 특별한 물건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메라의 부품들은 황동, 알루미늄, 철 및 고무로 만들어진
물건들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값싼 물건들이 조립되어 카메라가 되었을 때 엄청난 가격이 된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그 사실은 나를 무척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처남 우찌다 사부로(1899-1982)와우찌다의 옛 수하였던 마에다 다께오(1909-1975)와 함께,
요시다 씨는 35mm 거리계 카메라를 개발하기 위해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그 연구소는 도쿄 롭퐁기 아자부 구(현재 미나토 구)에 있는 우아한 3층 아파트(다케카와야 빌딩)의
한 방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나 요시다 씨는 카메라를 생산하기 위해 연구소가 취한 접근 방식이
그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1934년 가을에 그 연구소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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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은 잠수함은 이고입니다. 가장 좋은 비행기는 모델 92입니다.
가장 좋은 카메라는 관음입니다. 그들은 모두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품입니다.
이 글은 아사히 카메라 잡지 1934년 6월호에 실렸던 일본에서 생산된 35mm 거리계 카메라의 표준형
“관음”에 관한 대담한 광고 카피였습니다.
표준형 카메라의 이름은 요시다 씨가 “자비의 불교 여신, 관음”의 신봉자였으므로
“관음” 이라 지었습니다. 카메라 로고는 수천개의 팔을 가진 관음 여신을 묘사했고, 렌즈의 이름까지도
부처의 제자인 마하카샤빠의 이름을 따서 “카샤빠”라고 했습니다.
전체 3개의 카메라 종류가 광고에 나타나 있으나,
그 카메라들은 모두 그림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모델이었으며, 실제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관음”은 결코 실제로 출시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요시다 씨가 10대의 “관음” 카메라를
완성했다고 증언했지만, 실제로 그 중 한대라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서기 1955년경에 발견된, “관음 모델 D”라고 불리는 카메라가 한 대 있었으나, 그것은 “라이카 모델 II”
의 복제품이었고 요시다 씨가 만든 카메라가 아니었습니다.“관음 모델 D”의 제작자는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아무튼 최초의 일본 고급 35mm 거리계 카메라의 제조는 독일이나 다른 서방 국가에 뒤지고 싶지 않았던 한 엔지니어의 자긍심과
꿈의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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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 카메라를 상용화하기 위해 이루어진 집중적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는 아직 카메라의 중요 구성 부품인 렌즈와
거리계를 조달할 전망이 없었습니다. 번민의 숙고 끝에 연구소는 Nikkor의 렌즈를 이용하기 위해 니뽄 고까꾸 고교(일본 광학 산업 주식회사,
니콘 주식회사의 전신임)로부터 협조를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니뽄 고까꾸는 군사 장비를 전문으로 하는 최신의 제조 시스템을 갖춘 일본 최대의 광학 장비 제조 회사로
그 위치를 이미 확립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 니뽄 고까꾸의 회계사였던, 우찌다 사부로씨의 형인
우찌다 료노수께씨가 우찌다 사부로씨를 실무 담당의 부사장인 호리 도요따로씨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 당시 니뽄 고까꾸의 정책은 민간용 제품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었고, 호리씨는 비 군사 제품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급 렌즈의 민간 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의 협조 요청 시기는 완벽했습니다.
양측의 이익을 인식한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와 니뽄 고까꾸는 니뽄 고까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한사 캐논(Nikkor 50mm f/3.5 렌즈를 장착한 표준 모델)” 개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공동 개발하에 최초의 캐논 카메라가
1936년 2월에 시장에 소개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실제 날짜가 1935년 10월이라고도 하지만). “한사 캐논”을 제조하기 위해, 니뽄 고까꾸는 렌즈,
렌즈 마운트, 뷰파인더의 광학 시스템과 거리계 메커니즘을 맡았고, 반면에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는 포컬플래인 셔터를 포함한 본체,
카메라 본체의 조립은 물론 거리계 커버 제조를 맡았습니다. 후에 “관음”이라는 이름은 재판을 위한 표준 또는 성경을 뜻하는 “캐논”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정밀을 좌우명으로 노력하는 정밀 산업 회사의 새로운 상표, “캐논”은 이 무렵 태어났습니다.
“한사 캐논”이 출시되었을 때,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판매 채널이 없었으므로 오미야 샤신 요힌 주식회사(오미야 카메라 및 부품 판매상)와 독점 판매 및 상표 표시 계약을 사전에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사”는 오미야의 상표였으며, 중세 유럽 도시의 상인 조합 중 한사 동맹에 그 어원을 두었습니다.
1936년 6월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는 메구로 구로 이전하고 당시 전국적으로 불고 있던 국수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그 이름을 일본 정밀 광학 기기 연구소로 변경했습니다.
새로운 회사 이름이 공공 매체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사히 카메라 1936년 8월호에 게재된 “한사 캐논” 카메라의 광고에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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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기사가 아사히 카메라 1935년 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한사 캐논 카메라… 캐논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라이카의 모방품이다. 콘택스의 영향도 약간은 엿볼 수 있으나,
주요 기능들을 라이카를 본떠 만들었다. 카메라 크기는 13.5cm x 6.8cm x 4.5cm이고 무게는 대략 650그램이다. 특수한 필름 매가진을 사용하고,
렌즈는 니뽄 고까꾸의 Nikkor 50mm f/3.5이다. 렌즈는 분리 가능하고, 후면에 있는 단추를 누름으로써 지정된 위치로 팝업되도록 설계되었다.
스냅 촬영 케이스를 포함하여 275엔이다.
”카메라 산업 일각에서 “한사 캐논”을 라이카의 일제 모방품이라고 불렀지만, 일본의 최초 고품질 35mm 거리계 카메라를 대표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비록 아직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제조 회사의 제품이었지만,
이 카메라는 카메라 산업의내 외부로부터 상당한 관심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용 출처 : http://www.canon-ci.co.kr/actions/CompanyUserHistory1933Fix?cmd=list
자주 생각을 해본다.
내가 무엇을 잘 하는가에 대해서..
디자인,타이포그래피,사진,음악,자전거 등등등등 내가 해왔던 것들은 다 잘했다.
또, 상황에 따라 장르가 조금씩 바뀌어도, 곧 금새 적응을 하고, 색깔을 마음껏 내비쳤다.
그래서 늘 한편으론 난 천재가 아닐까? 라는 착각에도 많이 많이 빠져들곤 했다.
지금도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그 누구보다도 못하진 않을 것이다.
모든 부분에 있어서 말이다.
헌데, 왜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겠을때가 생기는건지?
그건, 내가 나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세상 모든 이치들이 그러하듯, 모르고 있을때는 그렇게 어렵게만 대단하게만 보이다가..
그 이치를 깨닫고 나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당연한 것들이 많아 지다보니, 자주 내가 뭘 잘하는지, 특별난게 뭔지를 모르게 되는 경우들이 생겨난다.
그럴때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다보면, 역시.. 아직 나 살아있구나 하는 것들을 느끼는데..
뭐든 익숙해지는게 가장 무서운거 같다. 그래서 늘 긴장감을 유지를 시켜줘야 하는데..
갈 수록 긴장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없어진다.
24살때 10년전 사랑했던 그 친구가 “애인끼리는 늘 긴장해야 한다”고, 언제 바람날지 모르니,
“예쁜 나를 니가 지키려면 늘 긴장하도록 해야….” 라는 말이.. 그땐 그저 바람피는 뭐 그런것으로만 생각을 했는데..
그때 그애의 말이, 어린왕자의 여우의 말이랑 다를게 없더라.
나이를 먹을수록 그 애의 말이 이리도 안떠나고 계속 생각이 드는걸 보면.. 말이야.
아이쿠! 나는 오늘 이 새벽 녀석들이랑 한강을 관조하러 가련다.

2010년 9월 15일 아침 7시 30분 정도의 서울 뚝섬유원지의 하늘이다.
이걸 보면서 난 다시금 나를 돌이켜본다. 그동안 수련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진이라는 4각형 틀안에 담겨져 있는 저 색상
옛날이었으면 가운데 또는 오른쪽 아래에 내 로고나 이름을 넣었을 것이다.
일종의 소유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눈으로 본 저 하늘의 사진은 내 것이다 라는..
그것도 이젠 별 필요가치를 못느끼겠으니.. 많이 수련이 된 듯하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처럼 구지 인간의 머리로 뭔가를 생각해내어서 그렇게 하려는..
그냥 가만히 두어도 충분히 괜찮을텐데, 저 하늘에 이 우주에 이 땅에 이 숲에..
인간들은 인간이어서 그리 욕심이 많아서, 때로는 적지 않은 부분을 바꾸기도 한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는데…
물이 이름모를 높은 산 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나와 드넓은 바다로 가기까지..
땅은 존재하지만 그 위에 모든 동,식물 만물들이 그냥 자라고 죽고 그러하기까지..
땅과 물은 그냥 가만히 있으며 내버려둔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며,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일뿐이다라는 것을..
1살 2살 3살 꼬마아이가 땅에 까만 개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냥 발로 쿡 밝아 그 까만 개미를 죽여버리는 것처럼…
성인의 지적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꼬마아이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의 생각을 어찌 감히 알 수 있을까..
약함은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이긴다.
예전 내 트위터에서 청소에 대한 비움을 이야기 한적이 있었다.
밀린 설겆이나 밀린 빨래, 청소는 언제나 후련하다.
아마도 그건 물질적이던 정신적이든 무언가를 비우기 때문일 것이다.
비움은 필요함을 만들며, 필요함은 이롭게 만든다.
이렇게….
배가 고프다기 보단, 심적으로 무언가를 채우고 싶었는지..
짜파게티를 먹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이 물이랑 다를 바가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물이 흐르다 깊은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워야지 마침내 그 곳을 넘어 흐를 수 있는거 처럼..
모든 동물이 생명연장을 위해 먹고, 그것이 몸안에 가득해지면, 배설해내고..
비어있으면 체우고 싶고, 다 차오르면 비워내어야 하고..
그것이 인간의 마음 뿐은 아니겠지.
흔히 이야기 하는 것들 중 술잔도 마찬가지이며, 잔은 채워야 맛이라는 뭐 그런 유머들안에서도..
철학적인 요소들이 베이스에 깔려 있는 그런거 처럼..
짜파게티 먹다가 뜬금없이 몇자 끄적여 본다.
이 새벽.. 작업들을 마무리 하고, 난 또 무슨 상념에 잡혀있나..
인간이 기억이란 것들을 특히나 자신의 과거 일들을.. 회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만,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구나.
지나가다, 지나가다.. 지나가다..
그곳의 이름을 모르기에 도라 명명한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보면 크다라고 할 수 있다.
크다는 것은 지나감이라 할 수 있고, 지나가는 것은 멀리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멀리 가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노자 25장 중에서
달타령
이월에 뜨는 저 달은 동동주를 먹는 달
삼월에 뜨는 달은 처녀가슴을 태우는 달
사월에 뜨는 달은 석가모니 탄생한 날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오월에 뜨는 저 달은 단오 그네 뛰는 달
유월에 뜨는 저 달은 유두밀떡 먹는 달
칠월에 뜨는 달은 견우직녀가 만나는 달
팔월에 뜨는 달은 강강술월래 뜨는 달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구월에 뜨는 저 달은 풍년가를 부르는 달
시월에 뜨는 저 달은 문풍지를 마르는 달
십일월에 뜨는 달은 동지팥죽을 먹는 달
십이월에 뜨는 달은 님 그리워 뜨는 달
이태백
이태백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당시의 뛰어난 시인이었던 두보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으로 일컬어 집니다.
두보가 시성(詩聖)으로 불리웠다면 이태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리웠습니다.
두보의 시가 당시 혼란스러웠던 중국의 시대상과 고통 속에 살던 민중들의 아픔을 노래했다면 이태백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초월하여 호방하고 낭만적인 시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태백을 일컬어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이라고까지 추켜 세우죠.
거짓과 모순으로 가득찬 현실을 초월하여 술로 고통을 잊으려 했는 지도 모르죠.
달타령에 나오는 내용은 아마도 전설때문으로 보입니다.
술을 좋아했던 이태백이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다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태백이 놀던 달’이라고 표현을 한 듯 합니다.
달이란 밤하늘에 떠 있는 존재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비로운 존재이며 낭만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이태백은 강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 여기저기 방랑을 하다 친척집에서 병들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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