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Saturday, 13. February 2010

4번은 읽었던거 같다.
오늘 탐앤탐스에 앉아서 나름의 총정리를 해봤다.
그리드 책도 한번 더 읽고, 총정리를 한 뒤, 그리드를 넘어서로 넘어가려한다.
에밀루더의 타이포그래피 중에서 가장 와닿았던 내용들을 정리해봤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단연 최고는 노자 도덕경 11장이었다.
타이포 그래피와 디자인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모더니즘의 수많은 기본 가설과 전제 조건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보다 좋은 디자인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열망 또한 당연시되는 듯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그다지 깊이 신뢰할 것이 못 된다.
현대라는 허울을 쓴 사이비 장인정신과 가식적인 허세들이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그래픽 디자인 이상으로 기술과 정확성, 그리고 질서가 있는 표현이다.
표(table)작업은 타이포그래퍼가 재료를 배열하는 기술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때 순수한 형태상의 요구 또한 외면해서는 안된다.
표의 구성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기술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열차 시간표 한 장이, 현란한 색채와 도형이 가득한 작업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 돌 수도 있다.
리듬이 없다면, 삶이 있을 수 없고, 아예 창조 자체가 있을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은 리듬에 맞춰서 그 나름대로 성장 단계를 거친다.
바람의 영향을 받아 숲과 옥수수밭과 모래사장이 리듬에 맞춰서 움직인다.
기계의 출현은 리듬이란 것이 노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일하는 사람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평형 감각이 리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이 리듬을 활용할 기회가 많다.
직선과 곡선, 수평선과 수직선, 사선적 요소, 시작과 끝 등이 서로 합쳐져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패턴을 만들어 낸다.
어센더와 디센더, 곡선과 점형, 대칭과 비대칭 등의 리듬 요소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 사각글 (b.c 2-1세기),데바나가리 글자(11세기), 루닉 글자(스웨덴), 아라비아 옛 왕국 사바의 비문, 고대 바빌로니아의 쐐기글자,고대 페르시아의 쐐기글자, 고대 아라비아 퀴픽 글자 등 낯선 글자 형태는 비록 읽지는 못한다 해도 무언가 호소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글자들을 말하자면 하나의 예술 작품에 비견될 만한 형태적 유형으로 감상한다.
만일 우리가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있다면, 그 글자들이 형태로서 갖는 매력은 금새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밤중에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브로드웨이를 바라보던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누구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참으로 매력적인 요술의 정원이로다!”
점점 더 모더니즘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느 가운데, 좋은 타이포그래피라면 일단 쉽게 읽을 수 있어야하며, 형태는 그 다음 문제다.
우리의 감수성, 즉 시각적 인식과 심미적인 감각은 기하하적 구성보다 우선하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 대립되는 흑백의 균형을 맞출때 반드시 이 감수성에 호소해야 한다.
구체미술 선언문에서 구성주의 회화의 대표자인 테오 반 되스부르크는 1930년에 이런 글을 썼다.
“구성은 배열(장식) 및 조립과 전혀 다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각기 다른 취향에 따라 각자의 감수성을 통해서 구성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만일 손으로 직선을 똑바로 그을 수 없다면, 우리는 자를 사용해서 선을 긋는다. 만일 맨손으로 원을 그릴 수 없다면, 우리는 컴퍼스를 이용해서 원을 그린다. 더욱 큰 완벽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이 개발해낸 모든 기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28년 바우하우스 지에서 폴 클레는 구성에 대한 강한 회의를 표명했다.
“우리는 구성에 구성을 거듭하지만, 직관은 여전히 훌륭한 것이다. 직관 없이도 상당히 많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모든 것들 만들어낼 수는 없다.”
사람의 기관인 눈에 제대로 보이는 활자는 만들 수 없다.
눈은 수직선보다 수평선을 크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생리적 착시를 단순히 환상 정도로 무시해서는 안된다.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이 착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인간이 창조적 활동에서 활용하는 모든 수단은 그 나름의 수치와 범위를 가지고 있다.
건축에서는 공간을 둘러싸는 면들과 그것에 의해 둘러싸인 체적이 있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는 이차원적인 공간에 한정된다.
공간이란 한 가지 값만 존재해도 비례의 문제가 일어나는데 이는 가로, 세로, 높이의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여러 수단이 작업에 도입되면, 진정한 비례의 문제, 즉 일정한 크기의 관계 속에서 몇몇 요소들을 조직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수세기 동안 중세의 신비주의로 부터 르네상스의 비례 체계를 거쳐 르 꼬르뷔제의 모듈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대상들을 일정한 규칙들과 고정된 수치 체계에 종속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 번째는 감정과 직관에 의해 창조되어 나중에 수치 패턴에 맞춰진 작품이 계산으로 도출된 원리에 근거하여 구성된 작품과 나란히 한 자리에 놓이는 잘못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무능을 부추기는 버팀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르 꼬르뷔제의 모듈은 경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오랜 동안의 창조적인 삶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젊은 건축학도들에게는 똑같은 모듈이 오히려 위험한 함정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색채에 숫자를 매겨 올바른 색채만을 한데 모아 정리하려던 오스왈드의 대대적인 노력도 실질적인 색채 문화에 사실상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
비율체계가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타이포그래퍼를 대신해서, 하나의 값과 다른 하나의 값이 어떻게 관련을 맺어야 할지를 결정해줄 수는 없다.
그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개별적인 값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비율이 어느 정도까지 효과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례감을 훈련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타이포그래퍼는 조화를 해칠 정도로 여러 값들 사이의 긴장이 커지는 경우가 어떤 때인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긴장이 없다면 너무 단조로워지기 때문에 이와 동시에 긴장이 없는 상태를 피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긴장이 너무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 하는 것은 타이포그래퍼가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본질에 입각해서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결정인 것이다.
이른바 3:5:8:13 황금률이라는 것도, 어떤 작품에는 훌륭히 적용되지만, 또 다른 작품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엄격한 수치를 바탕으로 하는 원리는 항상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클레와 칸딘스키는 선이 점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모든 형상이 비롯되는 곳, 즉 움직임이 시작되는 점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점이 움직이면 선이 생겨나고, 선이 움직이면 평면이 생겨나고, 평면이 모이면 입체가 생겨난다.
대비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사고방식이 아니다.
대비도 조화로운 전체 속에서 통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립을 통해서만 실재할 수 있는 개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위와 아래 또는 수평과 수직 따위가 그러하다.
현대인은 대비를 떠나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평면과 공간, 멀고 가까움, 안가 밖이 더 이상 어느 하나만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 뿐만 아니라 둘 다도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작품을 창조하면서 리듬감을 중요시해왔고, 이에 건축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비록 일정한 분할로 이루어지는 그리드 설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건축은 일종의 논리적인 절차로 여겨졌을 수도 있지만…
체계 자체가 명쾌함 및 정확한 비례에 근거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결과물들은 대단히 낯선 것이다.
기법, 디자인, 조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예기치 않고 일어나는 우연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계산되고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우리는,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기법상의 약점들을 독특한 매력으로 승화시킨 인쇄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기법과 디자인에 관한 모든 야심을 제쳐두고 다만 그 기능만을 완수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보통 무명의 작가들인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닌 그 시대의 진정한 기록물을 창조해낸 셈이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구겨진 종이 조각에서 보이는 우연성의 아름다움은 비틀리거나 제 자리를 벗어난 활자 더미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과거의 유용성은 사라졌지만, 무의미하게 나열된 활자들에 내재된 매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목적이 없다고 해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까지 무시될 수는 없다.
낱말과 글줄로 구성될 때는 정적인 글자들도 읽는 방향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시선이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옮겨가는 것과 발맞춰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며, 글줄이 추가되면서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타이포그래피에는 언제나 읽는 과정이 존재하게 마련이며 정적인 타이포그래피란 있을 수 없다.
창조적인 고백에서 클레는 고대인과 현대인의 자세를 운동에 비유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서 거기서 적절한 즐거움을 얻고 그 배의 편안함을 만끽한다. 그것이 바로 고대인이 사물을 그려내는 방법이었다.
자, 이제 현대인이 기선의 갑판을 걸으면서 무엇을 경험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자기 자신의 움직임이고,
둘째는 자신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이 될 수도 있는 배의 움직임이고,
셋째는 강물이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이고,
넷째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고,
다섯째는 지구 운동의 궤도이고,
여섯째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과 별들의 궤도이다.”
타이포그래피는 아무리 간단한 형태에도 이러한 현대의 인식을 반영한다.
4번은 읽었던거 같다.
오늘 탐앤탐스에 앉아서 나름의 총정리를 해봤다.
그리드 책도 한번 더 읽고, 총정리를 한 뒤, 그리드를 넘어서로 넘어가려한다.
에밀루더의 타이포그래피 중에서 가장 와닿았던 내용들을 정리해봤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단연 최고는 노자 도덕경 11장이었다.
타이포 그래피와 디자인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모더니즘의 수많은 기본 가설과 전제 조건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보다 좋은 디자인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열망 또한 당연시되는 듯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그다지 깊이 신뢰할 것이 못 된다.
현대라는 허울을 쓴 사이비 장인정신과 가식적인 허세들이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그래픽 디자인 이상으로 기술과 정확성, 그리고 질서가 있는 표현이다.
표(table)작업은 타이포그래퍼가 재료를 배열하는 기술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때 순수한 형태상의 요구 또한 외면해서는 안된다.
표의 구성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기술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열차 시간표 한 장이, 현란한 색채와 도형이 가득한 작업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 돌 수도 있다.
리듬이 없다면, 삶이 있을 수 없고, 아예 창조 자체가 있을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은 리듬에 맞춰서 그 나름대로 성장 단계를 거친다.
바람의 영향을 받아 숲과 옥수수밭과 모래사장이 리듬에 맞춰서 움직인다.
기계의 출현은 리듬이란 것이 노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일하는 사람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평형 감각이 리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이 리듬을 활용할 기회가 많다.
직선과 곡선, 수평선과 수직선, 사선적 요소, 시작과 끝 등이 서로 합쳐져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패턴을 만들어 낸다.
어센더와 디센더, 곡선과 점형, 대칭과 비대칭 등의 리듬 요소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 사각글 (b.c 2-1세기),데바나가리 글자(11세기), 루닉 글자(스웨덴), 아라비아 옛 왕국 사바의 비문, 고대 바빌로니아의 쐐기글자,고대 페르시아의 쐐기글자, 고대 아라비아 퀴픽 글자 등 낯선 글자 형태는 비록 읽지는 못한다 해도 무언가 호소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글자들을 말하자면 하나의 예술 작품에 비견될 만한 형태적 유형으로 감상한다.
만일 우리가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있다면, 그 글자들이 형태로서 갖는 매력은 금새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밤중에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브로드웨이를 바라보던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누구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참으로 매력적인 요술의 정원이로다!”
점점 더 모더니즘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느 가운데, 좋은 타이포그래피라면 일단 쉽게 읽을 수 있어야하며, 형태는 그 다음 문제다.
우리의 감수성, 즉 시각적 인식과 심미적인 감각은 기하하적 구성보다 우선하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 대립되는 흑백의 균형을 맞출때 반드시 이 감수성에 호소해야 한다.
구체미술 선언문에서 구성주의 회화의 대표자인 테오 반 되스부르크는 1930년에 이런 글을 썼다.
“구성은 배열(장식) 및 조립과 전혀 다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각기 다른 취향에 따라 각자의 감수성을 통해서 구성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만일 손으로 직선을 똑바로 그을 수 없다면, 우리는 자를 사용해서 선을 긋는다. 만일 맨손으로 원을 그릴 수 없다면, 우리는 컴퍼스를 이용해서 원을 그린다. 더욱 큰 완벽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이 개발해낸 모든 기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28년 바우하우스 지에서 폴 클레는 구성에 대한 강한 회의를 표명했다.
“우리는 구성에 구성을 거듭하지만, 직관은 여전히 훌륭한 것이다. 직관 없이도 상당히 많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모든 것들 만들어낼 수는 없다.”
사람의 기관인 눈에 제대로 보이는 활자는 만들 수 없다.
눈은 수직선보다 수평선을 크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생리적 착시를 단순히 환상 정도로 무시해서는 안된다.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이 착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인간이 창조적 활동에서 활용하는 모든 수단은 그 나름의 수치와 범위를 가지고 있다.
건축에서는 공간을 둘러싸는 면들과 그것에 의해 둘러싸인 체적이 있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는 이차원적인 공간에 한정된다.
공간이란 한 가지 값만 존재해도 비례의 문제가 일어나는데 이는 가로, 세로, 높이의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여러 수단이 작업에 도입되면, 진정한 비례의 문제, 즉 일정한 크기의 관계 속에서 몇몇 요소들을 조직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수세기 동안 중세의 신비주의로 부터 르네상스의 비례 체계를 거쳐 르 꼬르뷔제의 모듈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대상들을 일정한 규칙들과 고정된 수치 체계에 종속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 번째는 감정과 직관에 의해 창조되어 나중에 수치 패턴에 맞춰진 작품이 계산으로 도출된 원리에 근거하여 구성된 작품과 나란히 한 자리에 놓이는 잘못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무능을 부추기는 버팀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르 꼬르뷔제의 모듈은 경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오랜 동안의 창조적인 삶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젊은 건축학도들에게는 똑같은 모듈이 오히려 위험한 함정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색채에 숫자를 매겨 올바른 색채만을 한데 모아 정리하려던 오스왈드의 대대적인 노력도 실질적인 색채 문화에 사실상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
비율체계가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타이포그래퍼를 대신해서, 하나의 값과 다른 하나의 값이 어떻게 관련을 맺어야 할지를 결정해줄 수는 없다.
그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개별적인 값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비율이 어느 정도까지 효과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례감을 훈련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타이포그래퍼는 조화를 해칠 정도로 여러 값들 사이의 긴장이 커지는 경우가 어떤 때인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긴장이 없다면 너무 단조로워지기 때문에 이와 동시에 긴장이 없는 상태를 피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긴장이 너무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 하는 것은 타이포그래퍼가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본질에 입각해서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결정인 것이다.
이른바 3:5:8:13 황금률이라는 것도, 어떤 작품에는 훌륭히 적용되지만, 또 다른 작품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엄격한 수치를 바탕으로 하는 원리는 항상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클레와 칸딘스키는 선이 점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모든 형상이 비롯되는 곳, 즉 움직임이 시작되는 점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점이 움직이면 선이 생겨나고, 선이 움직이면 평면이 생겨나고, 평면이 모이면 입체가 생겨난다.
대비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사고방식이 아니다.
대비도 조화로운 전체 속에서 통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립을 통해서만 실재할 수 있는 개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위와 아래 또는 수평과 수직 따위가 그러하다.
현대인은 대비를 떠나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평면과 공간, 멀고 가까움, 안가 밖이 더 이상 어느 하나만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 뿐만 아니라 둘 다도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작품을 창조하면서 리듬감을 중요시해왔고, 이에 건축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비록 일정한 분할로 이루어지는 그리드 설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건축은 일종의 논리적인 절차로 여겨졌을 수도 있지만…
체계 자체가 명쾌함 및 정확한 비례에 근거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결과물들은 대단히 낯선 것이다.
기법, 디자인, 조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예기치 않고 일어나는 우연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계산되고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우리는,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기법상의 약점들을 독특한 매력으로 승화시킨 인쇄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기법과 디자인에 관한 모든 야심을 제쳐두고 다만 그 기능만을 완수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보통 무명의 작가들인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닌 그 시대의 진정한 기록물을 창조해낸 셈이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구겨진 종이 조각에서 보이는 우연성의 아름다움은 비틀리거나 제 자리를 벗어난 활자 더미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과거의 유용성은 사라졌지만, 무의미하게 나열된 활자들에 내재된 매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목적이 없다고 해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까지 무시될 수는 없다.
낱말과 글줄로 구성될 때는 정적인 글자들도 읽는 방향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시선이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옮겨가는 것과 발맞춰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며, 글줄이 추가되면서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타이포그래피에는 언제나 읽는 과정이 존재하게 마련이며 정적인 타이포그래피란 있을 수 없다.
창조적인 고백에서 클레는 고대인과 현대인의 자세를 운동에 비유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서 거기서 적절한 즐거움을 얻고 그 배의 편안함을 만끽한다. 그것이 바로 고대인이 사물을 그려내는 방법이었다.
자, 이제 현대인이 기선의 갑판을 걸으면서 무엇을 경험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자기 자신의 움직임이고,
둘째는 자신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이 될 수도 있는 배의 움직임이고,
셋째는 강물이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이고,
넷째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고,
다섯째는 지구 운동의 궤도이고,
여섯째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과 별들의 궤도이다.”
타이포그래피는 아무리 간단한 형태에도 이러한 현대의 인식을 반영한다.